좁다

지금의 감정은…약간의 복통으로 인한 우울함. 난 왜 이럴까 라는 자괴감.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죄책감. 자라지 못할꺼라는 좌절감. 게으름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. 그럼 감정의 바다위에 홀로 잠겨있는 것 같다.

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? 왜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?

내면이 무너져 있으면 멋진 겉치장도 모다 거추장 스러울 뿐. 내가 그런 모습 아닐까?

그래. 그런 모습이겠지.

망망대해에 혼자 있는 느낌이겠지만, 실은 그 바다는 무척이나 좁은 바다고, 거기에 혼자 있는 나도 무척이나 작은 존재다. 이  좁은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. 받아들이고, 인정하고, 뛰어넘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. 그래서 세상은 아직 즐거운 모양이다.

허안님의 와선별부에서 한번 따와봤습니다.

설자(楔子)

그 동안 내가 여기 저기 전하는 자료를 모은 결과 당시의 절대고수들이 모두 시기는 다르지만 동일한 질문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. 그 질문이 행해진 배경이나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무척 흥미로운 일이라 이것을 한번 정리해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.

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 날 해도 공자가 화무제를 찾아가 물었다.
“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? 혹은 어르신은 왜 사십니까?”
“희망이 있는 한, 삶이 있다.”
화무제의 그러한 답을 듣자 해도가 다시 물었다.
“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고요?”
“아니다.”

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 날 해도 공자가 증조부 해명신군에게 물었다.
“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? 혹은 할아버님은 왜 사십니까?”
“사랑이 있으므로 사람이 살아야 한다.”
“할아버님은 어떤 사랑으로 세상을 사십니까? 그리고 사랑은 무엇입니까?”
“사랑은 의지의 행위이다.”
“솟아나는 감정이 아니고요?”
“아니다.”

전하는 바에 따르면 문병옥이 어느 날 일천검에게 물었다.
“사람은 왜 살아야 합니까? 혹은 스승님은 왜 사십니까?”
“나는 살고 있지 않다.”
그 자리에 있던 신주일군이 그 말에 반응했다.
“저건 지가 정말 신(神)인줄 아나?”
그러자 문병옥이 다시 신주일군에게 물었다.
“그러는 스승님은 어떻습니까? 왜 사십니까?”
“나는 아직 못 배우고 못 해본 것이 많다. 죽기는 이르다.”

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 소림 승려가 수미대사에게 물었다.
“사람은 왜 살아야 합니까? 큰스님은 왜 사십니까?”
“나도 예전에 같은 질문을 부처님께 한 적이 있다.”
“무슨 대답을 얻으셨습니까? 제가 알려주시면 아니 됩니까?”
“얻은 적이 없으니 알려줄 것도 없다.”

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느 날 문병옥이 서인초에게 물었다.
“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? 주공은 왜 사십니까?”
서인초는 대답했다.
“나는………….”

- 이한서(李瀚瑞)저  강호사설(江湖辭說) -

신주일군같은 마음으로 다시 한번 제대살아봐야겠습니다.

Posted in think at March 26th, 2007. No Comments.